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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그 추억] (1) 고향집 겨울 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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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그 시절, 그 추억] (1) 고향집 겨울 추위

[기획 연재]

생활문화는 옛 부터 전해내려 오는 그 지역의 삶이자 우리조상들의 지혜와 생존 전략이다.

넘쳐나는 생활정보와 전자기기,산업화,도시화에 삶은 때로는 우리들의 가슴을 짓누름에 살아가야하는 팍팍한 현실입니다.

일을 위해 사는 건지 살기 위해 일하는 것인지 분간 조차 힘들때가 많습니다.

본지는 잊혀져가는 지난날 우리네 삶을 잠시 되돌아보고 조상들의 생활지혜와 자취의 숨결을 회상해 보기 위해 “그 시절 그 추억”란을 주 1회 기획 게재 합니다.

이 글을 읽다가 잠시나마 그 시절을 회상하는 아름다운 시간이었어면 합니다.

특히 이 난에 소개되는 각종 소재나 내용들은 각 지역의 삶의 방식이나 시각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날수 있어며 특정지역이나 인물,성별,나이,종교,직업등을 비하 하거나 편견 하지 않습니다 . -편집자 주 -

 

 (1)고향집 겨울 추위

 

지금이야 각종 온열 제품과 질 좋은 건축 자재들이 많아 어느 정도 추위를 막아 주지만 70년대에 초등학교 다나던 시절 내가 살던 시골 마을은 겨울방학때면 유난히도 추웠던 기억이 난다.

그 시절은 아무리 따뜻한 한낮이라도 옷을 껴 입었음에도 아랫도리가 시리고 귓불이 벌겋게 달아 오르고 손발은 터서 쩍쩍 갈라진데다 콧물이 줄줄 흘러 내리면 미쳐 딱을 순 없을땐 옷 소매로 씨~익 딱거나 심지어 입으로 훌쭉 빨아 먹기도 했다. 

옷을 껴 입는다고 입어 봐야 보온이 잘안돼 무겁기만 무겁지 따뜻하지도 않은 것으로 기억 하는데,요즘 주변서 애기하면 그땐 옷감 재질이 좋지 않은 “나일론”이나 “다우다”여서 너나 할것 없이 손과 얼굴이 트는건 당연 했다고 한다.

게다가 한낮이라도 햇살이 들어오지 않는 그늘에 가면 추워서 동네 몫 좋은 양지바른 블록담을 찾아가면 이미 동네 형들이 쭉 기대어서서 햇볕을 쬐고 있어니 발길을 돌린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던 기억이 난다.

게다가 해가 빨리 떨어지면 추위가 엄습하기 때문에 대부분 어른이나 아이들 할것 없이 해지기전 하루의 일과를 마무리 하는게 다반사 였다.

 

우리집은 3칸 기와집에 위 아래채가 나눠져 윗채에 나무마루(대청)가 딸린 방 3개 아래채에 방 2개로 부모님을 비롯 여덟 식구가 살았다.

당시 마을에서는 좀 큰집에 속했어나 지금처럼 바람을 막는 유리 현관은 없이 방문 열면 바로 난달(바깓) 이었다.

윗채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방 한칸을 사용 하셨고 또 다른 한간은 식당과 고방(광)으로 또 다른 한칸은 누나 3명이 함께 사용 한터라 나는 대문옆에 붙은 아래채 한 칸이 내방이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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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일과중 어머니께선 새벽과 해지기전에 제일 바쁘셨다.

겨울철 새벽 4시면 한밤중에 추위가 엄습함에도 부엌에선 벌써부터 딸그락~딸그락 소리를 내셨다.

없는 찬거리에 가족들의 아침밥과 6개의 점심도시락을 싸기 위해 오늘은 어떤 반찬을 내 놔야 할지 하는 한 없는 고심은 아마 추위보다 더 힘드셨을것 같았는데 나와 가족들은 어머니께서 밥상을 들여밀때 눈꼽을 떼었고,

아버지께서도 언제 일어 나셨는지 밤새 내려 쌓인 그 큰마당에 눈을 다 치우셨던 그때의 겨울아침이 뇌리에 스치지만 그 부모님들은 이미 세상을 등지셨다.  

 

그시절 겨울밤은 내 생각으로는 너무나 춥고 긴긴밤 이었던 것으로 기억 한다.

어둠이 내리면 동네 유일한 가로등인 마을회관이나 딱 한집뿐인 점빵(상회) 불빛만 희미하게 동네를 비출 뿐 그야말로 겨울밤은 더욱 적막강산 이었다.

어머니께서 일찍 차려주시던 저녁밥 한 그릇 먹고 나면 그때 부턴 추워서 밖에 나가지도 못한채 방안에서만 생활해야 하기 때문에 겨울밤은 한 없이 길게만 느껴졌다.

게다가 지금처럼 그 흔한 TV나 변변치 않은 놀이도 없고 특별히 먹을것도 없었든 시절이라“추운데 밖에 나가지 말고 공부나 해라”는 부모님 말씀이 당연 했지만 그땐 하기 싫은 공부는 추우면 왼지 더 하기 싫어 졌는지 자식을 키워본 나로선 별 할 말이 없다.

 

겨울밤의 가장 중요한 채비는 매일 밤마다 온돌방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것이다.방안이 따듯해야 온가족이 밤을 샐 수 있었기에 몸이 두쪽이 나더라도 해야 한다.

어머니께선 밭일이라도 하시다 평소보다 늦게 불을 지펴야 할 경우 저녁준비와 방5곳의 아궁이를 번갈아가며 불을 피우시는 여간 힘드는 일로 이럴 땐 가족의 손을 좀 빌여야 한다.

나는 불을 너무 많이 지펴 불이 가까이 닿는 온돌 부분이 뜨거워 방안에 깔려 있는 나일론 돗자리가 새까맣게 타버린 기억도 난다.

또 너무 적게 지펴 새벽쯤이면 차가워진 방안에 입김을 내뿜어면 성에가 서렸거나 추위에 일찍 잠을 깬 그날도 있었지만 지금 생각 하면 그래도 그때가 행복 했었던가 보다.

 

아버지께선 매번 겨울이 다가 올 때면 추위와 샛바람을 막기 위해 봄부터 뚫려 있었던 방문 문구멍과 문틈을 메꾸기 위해 겨울 채비를 하신 일이 눈에 선하다.

변변치 못한 종이와 칼 한자루 없었든지 문종이가 아닌 누런 밀가루 포대나 시멘트 포대 속지를 구해서 칼 대신 입으로 침을 바른 다음 적당한 크기로 잘라 풀칠을 하고 나면 어느듯 찬바람은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누런 종이 탓에 방안은 더 어두웠졌고 그래도 문틈 사이로 들어오는 샛바람은 이불이나 헌 옷가지를 꺼내 문틈을 막아주면 환기는 조금 더 막을 수 있었어나 종이도 유리도 귀하던 시절은 아버지께선 이 방법이 겨울나기에 최선이었을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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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엔 누런 황소 한 마리가 있었다.

그야말로 우리집 재산 1호 이다.

학교에 갔다오면 겨울밤 추위가 오기전에 황소의 저녁 소죽(밥)을 끓여 먹여야 하는 일은 전적으로 내 몫으로 초등학교 3~4학년의 체구 치고는 작은 편이라 소죽을 쑤기 위한 대행 가마솥은 그 뚜껑을 열기 조차 힘들었다.

아버지께서 며칠째 준비 해놓으신 소 먹이감인 여물(볏집)과 보리뒹겨,구정물(음식 찌꺼기물)을 함께 섞어 가마솥에 넣고 아궁이에 불을 지펴 1시간쯤 끌이면 가마솥은 눈물(김)을 흘리며 소죽이 완성되었다.

불을 땔때면(피울때)아궁에서 피워 나오는 연기는 이내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되어 줄줄줄 흘렀지만 아궁이에 미리 넣어둔 새까맣게 타버린 고구마를 꺼내 먹는 그맛은 지금도 잊을수 없다.

 

고구마 농사는 우리집의 주업 이었다.

추위가 오기전 고구마를 수확하면 내년봄에 종자로 쓸 고구마 몇포대만 남겨 두고 몽땅 시장에 내다 팔았다.

당시 어린 나로선 겨울에 먹을 것을 조금 남겨두고 팔았어면 했어나 아버지께선 여덟 가족이 먹여 살리기 위해 고구마를 돈으로 바꾸신것 같았다.

아버지께선 내년봄 종자로 쓸 고구마를 겨우내 따뜻한 곳에 잘 보관해 얼어 죽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가마니에 넣어 따뜻한 내방 한쪽 구석에 보관 하셨다.

나는 아버지 몰래 고구마를 꺼내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내방에 보관하는 자체가 기분 좋았다.

아버지께선 가끔씩 내방에 들러 고구마가 부패 하는지 관리 하셨고 확연히 줄어든 것이 눈에 보였음에도 아버지께서 자식들이 좀 꺼내 먹을 것도 미리 예상하고 필요량 보다 더 많이보관 하셨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겨울철 별미로 꼽히는 시래기국(우거지)과 토란국을 잘 먹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어린시절 겨울내내 어머니께서 매일 끓여 주신 국은 시래기국 아니면 토란국이였던 탓에 나이가 들어서도 왠지 그 국은 먹기 싫어졌다.

지금이야 겨울철이라도 신선채소와 각종 다양한 국거리도 많고 시래기국 전문업소도 생겨 몸에 좋다하지만 그 시절은 채소를 보관할 냉장시설도 없었고 시골서 구할 수 있었던 것은 바짝 마른 시래기 밖에 없었어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 였을테다.

 

지금은 겨울에 손발과 볼살이 부릅터고 손등어리가 쩍쩍 갈라져 피가 나오는 아이들은 보지 못한다.

우리는 이 모습을 추워서 손 발이 다 텄다고 이야기 했고, 그시절 왼만한 도회지서 생활한 아이들이나 제외하고는 흔히 시골마을에서는 볼 수 있었던 것으로 나도 그중 한명 이었다.

처음엔 약하게 손등이나 발등이 갈라지고 한 겨울이 오면 더욱 깊고 넓게 갈라져 나중엔 피가 질질 흘러 나오기도 했다.

치료라곤 고작 따뜻한 물에 씻거나 지푸라기 수세미로 벅벅 문지러거나 좀 살만한 집안에서는 안티**민이나 “바*린”정도쯤 발랐던 기억이 나지만 그래도 참고 견디며 추운 겨울이 지나 새봄이 오면 새살은 돋아났고 지금은 그 손발이 처자식을 먹여 살리는 희망의 손이 곱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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